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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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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 조계종의 행정 중심 사찰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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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曺溪寺)는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국내 제1의 포교전법 도장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 불교회관, 종각, 문화교육관이 있다. 불교회관에는 총무원이 있다. 총무원은 상징적 존재이자 구심점인 종정(宗正)을 최고 성직자로 추대하고 총무원장이 집행기관, 종회(宗會)가 의결기관으로, 장노원(長老院)을 조정기관으로 두고 있다. 지난 1991년 완공된 문화교육관에는 교육원 포교원이 있다. 이 포교원에서 조계사의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불교대학, 문화강좌, 강의실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 문화교육관은 기도나 법회 중심의 사찰 기능에서 탈피해 결혼식을 비롯 세미나, 강연회, 연극공연, 음악제, 전시회 같은 다양한 문화행사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 시민들에게 한발 더 다가가는 사찰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1910년 건립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절에는 종각 범종 사리탑비와 7층 석탑 1기가 있다. 원래 1층 목조건물이던 종각은 1973년 8월 육바라밀을 상징하여 2층 6각으로 개축된 것이다. 이 종각에는 신라계통과 중국계통의 범종 양식을 합친 형식으로 제작된 범종이 있다. 언제 제작된 것인지 확실치않은 이 범종은 높이 154cm, 구경 89cm이다. 원래 용문산 상원사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대웅전 뜰에 있는 사리탑은 1930년 인도의 고승이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하고 있다. 경내에는 수령이 5백년 가량되는 백송(白松)은 중국이 원산지인 삼엽송(三葉松)으로 원산지인 중국에선 거의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귀한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9호로 지정돼 있다. 수령 4백년 가량된 회화나무도 한 그루 있다.
<조계사 약사> 1911년 불교계 거성 한용운 이회광 두 스님이 중동고등학교 자리에 각황사란 이름으로 창건. 1938년 각황사를 지금의 조계사 위치에 옮겨짓고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태고사라고 함. 불교계의 중심 역할을 담당. 1954년 이 절을 중심으로 불교계 정화운동이 시작됨. 1955년 절 명칭이 조계사로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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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독부가 조선 사찰령을 선포, 우리나라의 사찰을 일본 사원인 장충단의 박문사(博文寺)에 귀속시키려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만해 용운 스님 등이 31본산주지회의를 열었다.
그 때 만해 스님이 <조선불교의 개혁안>을 통하여 조선 불교의 통일기반인 총본산 제도를 주창했다. 일본의 음모를 분쇄하고 승려들의 힘을 모으기 위한 구심체가 필요했던 것.
1929년 전국 104명의 승려가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1937년 각황사를 현재의 조계사로 옮기고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 절 이름을 태고사로 했다.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된다. 1945년 9월 이 곳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 일본강점기의 사찰령 및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 조선 불교 교헌(敎憲) 제정, 제1세 교정(敎正)에 한영, 중앙총무원장에 법린 스님 각각 취임.
일본의 사찰령은 한국 전통 불교의 독신 비구생활을 무시하고 처를 거느리게 하는 등 수도자로서의 타락을 교묘히 유도했다. 친일승려 회광이 교권을 잡으면서 중국 만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친일불교의 포교가 확대, 한국 불교의 맥마저 사라지다시피 했다.
당시 이같은 조계종 부패가 사회적인 물의를 빚게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석우, 효봉, 동산, 금오 등의 선사와 청담, 경산, 구산, 탄허, 지효 등의 중견수좌들이 앞장서 불교정화운동을 펴게된다.
이 운동은 비구와 대처 사이의 종권투쟁으로 비화, 치열하고도 오랜 공방 끝에 결국 비구측이 종권을 확보하고 태고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단락.
1962년 3월 통합종단으로 출발, 조계사가 대한불교 조계종의 행정중심사찰로 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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