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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서원
어계 조려의 충정을 추모하기위해
소재지 :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537-1

서산서원은 조선 6대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당한데 격념(激念)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생육신(生六臣) 중 함안사람인 어계 조려(漁溪 趙旅)가 영월에 가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른 후 백이산(伯荑山) 아래에서 여생을 보낸 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남의 유림들이 1703년(숙종29)에 건립하고 1713년(숙종39)에는 유학 손경장 등의 상소에 의하여 사액을 받은 곳이다.

그러나 1865년(고종2)에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고 채미정만 남아있던 것을 1902년에는 서천(西川)선생과 종중들이 유림들과 의논하여 사촌리에 서산서당을 건립하여 매년 3월 중정일에 미천제를 지냈다.
1980년부터 4년간 후손과 유림들이 도비보조를 받아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하여 사액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경내엔 양정당(養正堂, 동재, 헌관의 숙소), 상의재(尙義齋, 서재, 유생의 숙소), 생육신사적비, 절정공사적비와 강당으로 쓰이는 숭의당(崇義堂)과 내삼문안에는 전사청, 소청각과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그리고 길건너 동산아래에는 6·25동란에 훼손되었지만 예부터 있었던 자리에 채미정(采薇亭)을 복원하여 두었으며 채미정 길건너 서원철폐령이 내려 훼철된 옛 서원자리에는 그 사이 민가가 들어서 있다.
민가 깊숙히 원북리 마을 안동네에는 어계 생가가 있으며 서편 산록에는 함안조씨의 증시조이며 어계의 조부인 전서공(典書公) 조열(趙悅)의 묘역이 있다.

※ 생육신(生六臣)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

조선초기 (세종2∼성종20)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사람.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경상남도 함안출신이다.
고려말 충신 전서공(典書公) 열(悅)의 손자로 증사복사정(贈司僕寺亭) 안(安)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올바른 몸가짐으로 사물을 분별하는 지혜가 총명하였고 마땅히 해야 할 의리를 중히 여기고 사리(事理)를 뚫어지게 깨달아 환한 경지였다하며 사람마다 훌륭하게 될 그릇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글 공부에도 남달리 힘써 그 공부의 요령이 대의를 통투(通透)하는데 힘쓰고 헛되게 뜻 모르고 암송하는데 그치지 않고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따서 짓는 모방적인 습성을 배격하였다.

1453년(단종1)에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연소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한명회(韓明澮), 정인지 등과 공모, 무사를 이끌고 우의정 김종서(金宗瑞)의 집을 습격 그를 죽이고 사전에 준비했던 생살의 계획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 반대파 충신을 궐문에서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에 귀양보내는 계유정란(癸酉靖難, 1453)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이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여 실권을 잡게되자 어계는 수양의 행위에 비분(悲憤)함을 참지 못하고 더러운 조정에서 글 읽기를 싫다하여 유생(儒生)들과 작별하고 함안으로 낙향한다. 불사이군의 절의(節義)를 지켜 초야(草野)에서 자연을 벗삼아 홀로 개탄하고 비분하면서 낚시와 소요로 은둔생활을 하면서 단종을 연모하였다.


  찾아가는 길
◇ 승용차
* 가야읍 사거리에서 군북면 시가지로 진입후 원북동 방향으로 진입(약25분 소요)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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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가정보
[채미정(采薇亭) ]
옛 서원자리 밖에 있던 정자로서 세조의 왕위찬탈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낙향한 어계가 머물러 쉬던 곳이다.

사방 4칸 집으로 가운데 2칸이 방으로 꾸며져 있으며 퇴칸은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겹처마 팔작기와집. 추녀밑에 걸린 「百世淸風」이라 쓴 현판은 어계의 곧고 맑은 충절을 뜻하며 정자 앞에도 연당을 마련하였고 구름 다리를 설치하여 운치를 도우고 있다.

옛 건물은 6·25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의령 박씨네 가옥에 쓰이던 목재를 뜯어 옮겨와서 옛 자리에 옛과 같이 복원하여 둔 것이다.
[어조대(漁釣臺) ]
서원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어계천(漁溪川)에서 낙향한 어계가 비명에 간 단종을 애도하며 비분을 삭이면서 낚시를 즐기며 세월을 보내던 곳으로, 어계는 이 곳 이름을 본따 호(號)를 삼았다. 채미정에서 1㎞상거.

옛날에는 계천의 폭도 넓고 물도 깊어 고기도 많이 놀았던 곳으로 전한다. 그러나 5백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계천에는 사토(沙土)가 쌓이고 인근 주민들의 농토 조성을 하느라고 하천은 침식되고 더욱이 7·8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부근 일대가 시멘트로 덮혀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다만 고마암(고바위)에 하얗게 새겨진 "百世淸風"이 어조대와 더불어 옛날을 증명해 주고 있고 옆 공간에 숲이 우거져 소풍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어계집(漁溪集) ]
조려의 시문집으로 3권 2책, 목판본이다.

후손 적(績)이 원집 1권을 편집하여 1516년(중종 11)에 처음으로 간행하였으며 9세손 영석(榮 )이 흩어져 있는 시문을 다시 수집하여 부록 1권을 편집, 원집과 합편하여 1742년(영조 18)에 중간하였다. 그 뒤 후손 성호(性昊), 성순(性恂), 병규(昺奎) 등이 속집을 편집하여 원집 2권과 합편하여 1901년에 중간하였다.

권두에 발필주(朴弼周), 강혼(江渾) 등의 서문과 영석의 지문이 있다.

원집 권2 말에 영석의 발문, 속집 권두에 송병선(宋秉璿)의 서문, 권말에 이종기(李種杞)와 후손 성가(性家), 성호 등의 발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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