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번호 : 시도기념물 93호(경북) 
기념물분류 : [사적-사묘,재단]
면적 : 2654 ㎡
지정일 : 1993.11.30 
소유자 : 금성단 
관리자 : 금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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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단
단소를 정비하고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1리 70
금성단이 곳은 조선 세조 2년(1456)에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연루되어 순흥<順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던 세종<世宗>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강원도<江原道> 영월<寧越>에 유배된 단종<端宗>을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및 향중<鄕中> 유림<儒林>과 더불어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순절<殉節>한 의사<義士>들을 향사<享祀>하는 제단<祭壇>이다.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실패되자 순흥부는 폐읍되었다. 그후 숙종 9년(1683) 순흥부<順興府>가 복원<復元>되고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숙종 45년(1719)에 부사<府使> 이명희<李命熙>가 단소<壇所>를 설치하였으며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慶尙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를 정비하고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워 매년 춘추<春秋>로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 참고자료 : 문화재청 >


  찾아가는 길
◇ 승용차
● 서울 : 중부고속도로→이천IC→영동고속도로→남원주IC→중앙고속도로→제천IC→풍기IC→931번 지방도 영주방면→순흥면 내죽리→금성단

● 부산, 대구 : 경부고속도로→서대구IC→중앙고속도로→영주IC/풍기IC→931번 지방도 영주방면→순흥면 내죽리→금성단

● 광주, 전남 : 88고속도로→북대구IC→중앙고속도로→영주IC/풍기IC→931번 지방도 영주방면→순흥면 내죽리→금성단
◇ 대중교통
● 열차
* 청량리-풍기/영주(1일 9회 운행)
* 서울-천안-제천-영주(1일 21회 운행)
* 대구, 동대구-/영주(1일 6회 운행)
* 부산, 부전-영주(1일 5회 운행)
* 강릉-영주(1일 4회 운행)
* 대전-영주(1일 3회 운행)
* 영주역(054-631-7788, 풍기역(054-636-7788)

● 시외/고속버스
* 동서울-풍기, 영주 1일 32회 운행, 2시간 10분 소요
*동대구-영주, 1일 21회 운행, 1시간 30분 소요
* 부산-영주, 1일 9회 운행, 3시간 30분 소요
* 고속버스 안내 서울(02-446-8000, 455-2111), 영주(054-631-1006, 631-3264, 635-8927)

● 시내버스(영주-소수서원-부석사행)
시외버스 영주터미널에서 승차, 3-4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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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가정보
[순흥과 압각수에 관한 전설]
금성단 뒤 서쪽에 숱한 사연을 간직한 압각수 한 그루가 우람차게 서 있다. 이 압각수(은행나무)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목으로 불리며, 받들고 있는데 수령이 약 1,100년이고, 높이는 30m나 되며, 밑둥치 둘레는 현재 6m정도 되지만 남아 있는 뿌리 부분의 흔적으로 봐서 옛날에는 훨씬 더 컸을것으로 추정된다. 수형은 위로 힘차게 높이 뻗어 일부분 고목이 되어 불타 없어지거나, 썩어 속이 비기도 하지만 수백년 묵은 가지들은 오랜 연륜을 느끼게 하고, 그 우람찬 모습과 위용이 대단하다.

이 압각수는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운동과 관련한 파란많은 역사적 사실을 지켜보며 순흥의 흥망 성쇄를 같이 해온 역사적인 나무라고 할수 있다. 영주 향토지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1457년(세조3년) 정축지변이 터지자, 이 나무가 스스로 고사했으며 1629년에 불에 타고 일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한 술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순흥)가 폐하니, 이 은행나무가 죽고, 이 나무가 살면 순흥부로 다시 될것이라'고 하였는데, 그후 1643년에 과연 이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1682년에는 무성해지고 이듬해에 순흥부로 환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대군은 지금으로부터 539년 전인 1456 (세종3)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류되어 순흥으로 유배당해 압각수로부터 서쪽 500m 되는 곳에 위리 안치되었다.

그 이듬해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한 관소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 안동부사 한명진과 그 군졸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안동에서 최후를 마쳤다. 순흥은 역모지라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 살육되어 쑥밭으로 변해버렸다. 순흥부는 폐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버렸던 것이다.
수많은 순흥부민들이 살육되어 그 흘린 피가 죽계천을 흘러 10여리나 떨어진 지금의 안정면 동촌마을까지 흘렀다고 해서 그 마을을 지금까지 "피끝" 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금성대군이 세조에 의해서 한많은 세상을 떠난 그해부터 2백여년 동안 죽은듯이 있다가 1683년 (숙종9)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고 순흥부로 다시 승격되어 금성대군과 제의사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석단(石壇)을 모으자 이 압각수도 새순이 다시 돋아나 지금에 이르는 거목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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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단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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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단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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