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정토를 꿈 꾼 신라인. 그들의 이상세계가 예술적으로 승화, 구체화된 곳이 불국사이다. 토함산(745m)의 중턱 11만여평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25교구 본사의 하나로 그 경내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 법흥왕 22년에 창건되어 751년(경덕왕 10년)때 재상 김대성이 다시 지어 절을 면모를 새롭게 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건물은 물론 값진 보물들이 거의 불에 타거나 약탈되었다. 1920년 이전에는 일부 건물과 탑만이 퇴락한 채 남아 있었으나 지속적인 원형복구 및 보수로 국보 7점을 간직한 오늘날의 대사찰이 되었다. 불국사는 일주문도 없고 불이문 해탈문 사천왕문도 없다. 창건당시 청운교 백운교와 안양문의 연화칠보교를 통해 바로 들어가게끔 설계된 것이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돌계단이 다리로 불리는 것도 특이하다. 절 안 넓은 마당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다. 불국사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3km (포장도로 석굴로는 9km) 올라가면 동양 제일의 걸작으로 알려진 여래좌상의 본존불이 동해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석굴암이 있다. 불국사 석굴암은 1995년 12월6일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고,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세계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모든 의식(齋, 法會 等)은 상단예불(上壇禮佛)부터 시작합니다. 상단 공양물은 향, 초, 차, 과일, 꽃, 마지(香·燭·茶·果·華·摩旨)인데 향과 초는 안내에 따라 사용하도록 합니다.
부처님의 왼쪽에 벽면목각탱화로써 동진보안대보살을 주존(主尊)으로 화엄성중을 모시었고, 오른쪽에 금륜보계치성광여래와 그 권속(眷屬)을 모시었는데(七星閣) 이 양쪽을 중단(中壇)이라고 합니다.
뒤편에 조상(祖上)과 인연영가(因緣靈駕)의 위패를 모신 곳이 하단(下壇,靈壇)이며, 제사를 지내고 재(齋)를 올릴 때 영가(靈駕)에 대한 의식을 하는 곳입니다. ※引燈壇
2. 예경
법당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경건한 마음자세로 부처님께 합장 반배(合掌半拜)하시고, 적당한 위치에서 삼배(큰절)를 올립니다.( 3배, 각단3배, 각불3배, 7배‥‥‥) 그 다음에 영단에 3배(이 과정은 나가실 때도 같으며 법당입구에서 반배하고 나갑니다.)
절하는 방법은 합장하고, 합장자세로 그대로 몸을 낮추어 양쪽무릎을 동시에 꿇고, 왼손을 가슴 앞에 두고 오른손을 먼저 내려 바닥을 짚은 후 왼손을 짚으며, 윗몸을 굽히어 이마를 바닥에 대고, 양손바닥을 위로하여 부처님을 받드는 모양을 하고 왼발을 오른발 위에 포개어 예를 올리며, 일어날 때의 동작은 낮출 때의 동작을 반대로 합니다.
3. 불전과 복전
불전은 법당에 마련된 봉투에 넣어 부처님 전에 합장배례(合掌拜禮)한 후 불전함에 넣고, 다시 배례하고 서너 걸음 뒷걸음으로 물러납니다. 의식·수업의 끝에 정근(精勤)할 때에도 불전을 넣습니다. 재를 올리거나 제사를 지낼 때 영단을 향하여 의식 때 영가전 복전함에 복전을 넣습니다.
4. 법당에서의 자세와 행동
신을 벗어 신발주머니에 넣은 후 신장에 넣고 번호를 확인하시고, 법당안에서 덧신은 불허하나 덧버선은 좋습니다. (외투, 모자 벗고 단추는 잠금니다)
단정한 차림새로 차수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며, 앉은 자세에서는 합장·결인 또는 차수 합니다. 앉음새는 결가부좌, 반가부좌 또는 평좌로 몸을 세우고 바로 앉아야 합니다. 어간에서 지체하거나 절하거나 대화를 하지 않으며, 어간문으로 출입하지 않습니다. 방석을 밟지 않고, 절할 때는 기도수건을 준비하시어 방석 위에 놓으시면 좋습니다. 노출이 심하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지 않습니다.
5. 법문·법회 중 행동
법문 중에 어간으로 가거나, 가서 서성거리거나 하지 않으며, 사정이 있어 늦으신 분들은 법사님이나 동참 대중이 보는 위치에서 큰절을 하지 않고, 몸을 낮추고 이동하여 가급적 양측 옆줄에 최대한 붙어 줄 맞추어 앉아 앉은 자세로 3배를 올립니다. 법문 중에 드나들지 않으며 소변이 잦은 분들은 양측에 앉으시면 좋습니다. 마루 외에 앉으신 분들도 줄맞추어 앉습니다. 예불과 정근은 그 자체가 기도이므로 즉시 동참하며 법회를 할 때에도 개인행동을 일체하지 않고 즉시 법회에 동참합니다.
내림목탁, 찬불가 전주에는 반배, 예불의 매 단계, 염송문의 매 단계에도 반배. 법사스님께서 나오시기 전에 착석하여야 함. 수업 후 책상을 단보다 높지 않게 쌓아야 합니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阿斯達)은 다보탑(多寶塔)을 완성하고 석가탑(釋迦塔)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향에서 남아있던 그의 아내 아사녀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서 서라벌로 찾아왔다.
그러나 아사녀는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명탑 건립에는 정성을 중요한 바 석공들은 탑을 완성하기 전에 그 누구를 만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낙담한 아사녀는 불국사 근처 연못으로 갔다. 탑이 완성되면 그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것 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머나먼 곳에서 님을 찾아 왔건만 그리운 님을 지척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아사녀는 날마다 영지물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느날 보름달이 못 안을 비출 때 그 물속에서 하얀 탑이 보였다. 아사녀는 그리운 님의 이름을 부르며 물속으로 뛰어 들어 탑을 껴안았다. 그러나 그 탑은 환영이었다. 그리움에 지쳐서 탑의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마침내 석가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아내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내가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얘기를 듣고 비탄에 잠긴다.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연못 주위를 배회하던 아사달은 어느날 아내가 자살한 지점에 이르러 환상속에서 아내를 보게 된다. 아사달은 아내의 이름을 외치며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아내는 부처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석공도 그 영지에 투신했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석가탑은 무영탑(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으며 그 연못은 영지(그림자 연못)라고 불지게 되었다.
김대성과 창건 설화
김대성은 원래 신라 모량리에 사는 경조라는 가난한 홀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이름을 대성이라고 불렀다.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마을에 사는 부자 복안의 집에 머슴으로 살았다. 대성이가 열심히 일하자 주인 복안은 초가집 한채와 조그마한 밭을 대성에게 주었다.
어느날 한 스님이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하기를 청했다. 이에 복안은 베 50필을 스님에게 내주었다. 스님은 기뻐하여 이렇게 시주를 했으니 내세엔 억만배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성은 홀어머니께 뛰어가서 복을 짓기를 의논한 끝에 그들 모자의 전 재산인 초가집과 밭을 시주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대성은 갑자기 죽어버렸다. 대성의 어머니가 슬프하며 통곡하는데 그동안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재상 김문량의 집 지붕에서 "모량리 김대성이 너의 집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큰 소리가 들렸다. 김문량은 모량리로 사람을 보내 알아봤더니 바로 그 시각에 김대성이라는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그 때부터 김문량 부인이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아이는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일주일이 지나서야 폈는데 손 안에는 금으로 쓴 김대성이란 글자가 있었다. 아이 이름은 그대로 김대성이라 정해졌다. 모량리에 사는 전 어머니 경조도 김문량의 집으로 옮겨 살게됐다.
대성은 자라면서 사냥을 즐겼다.
하루는 토함산에서 곰 한 마리를 사냥하고는 토함산 남쪽 골짜기에서 밤을 새웠다. 한밤중이었다. 아까 잡았던 그 곰이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 그 곰이 대성을 잡아 먹으려고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대성은 놀라 도망가려 했으나 손과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대성은 그 자리에 엎드려서 빌었다. 무엇이라도 해 드릴테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곰은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물러서면서 "그대가 만일 나를 위해 절을 지어준다면 살려줄 것이다."고 말했다. 김대성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하고 나니 곰은 물러갔고 그것은 한바탕 무서운 꿈이었다.눈을 뜨니 곰은 눈을 부릅뜬채 죽어 있었다.
산을 내려온 대성은 약속대로 곰을 위하여 절을 지었따. 곰을 발견한 곳인 토함산 정상에는 웅수사를 세웠고 꿈을 꾼 자리에는 몽성사를 세웠다.
이 일로 대성은 크게 깨우쳐 현세 부모(김문량 내외)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 부모(경조부인)를 위하여 석굴암을 창건하였다.
입장료
어른
학생
어린이
군인
개인
3,000원
2,500원
1,500원
2,500원
단체
3,000원
2,300원
1,300원
2,300원
주차료
소형
대형
당일
2,000원
4,000원
부가정보
[사천왕문]
불교에서 사천왕이란 천상계의 첫 번째하늘인 욕계(欲界) 6천 가운데 제1천인 사왕천을 다스리는 왕들을 말한다. 불교에서 상정하는 하늘의 중앙에는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의 중턱 동 서 남 북에 각 천왕이 있어 그 지역을 관장한다. 사천왕이란 원래 고대 인도의 신화적 존재였으나 불교에 흡수되면서 온갖 귀신들을 다스리며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천왕들의 무서운 힘은 악함을 항복시키고 착함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착함은 이 문을 통과해도 악함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천왕문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에 이 문 밖은 하늘아래 천하가 되고 문안은 하늘위 천상이 되는 것이다. 사왕천을 사천왕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천하의 어떠한 힘으로도 천상은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반야교]
일주문을 들어서 조금만 가면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에 돌로 된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다.이 다리가 곡선 모양의 해탈교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불교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다리를 건너서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다리를 지나면 천왕문이 나타나고 천왕문 다음에 바로 나타나는 다리가 반야교이다. 반야는 지혜를 의미하고 지혜로 불국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하문]
글자 그대로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란 뜻이다.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자금색의 빛이 이 문에까지 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개는 시계를 흐리게 함으로 이로 인해 사람들은 미몽과 무지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 자하문을 지나면 사람들은 세속의 무지와 미몽에서 깨어나게 되고 대진리의 도량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자하문은 곧 성역에 들어서는 관문이 되는 셈이다. 신라 시대의 자하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1628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회랑]
대웅전의 정면문을 출입하는 것은 불경하므로 건물의 측면을 사용하는 것이 불교도의 관습이다. 자하문을 들어선 모든 참배객들은 곧장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회랑을 따라 측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법이다. 이 긴 회랑들은 범영루 경루 강당(무설전) 등 큰 건물들과 나란히 둘러서 있다. 통로 구실을 하는 것이다.
[범영루]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려다 보면서 그 왼쪽에 있는 건물이 범영루(泛影樓)이다. 원래 이 종각의 이름은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으로 수미산(須彌山) 모양의 8각 정상에 누각을 지어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오장간(五丈竿: 50자 높이의 칸)을 세울 만 하였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이란 세계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산으로 그 중턱에는 사천왕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래의 형상은, 인간의 온갖 번뇌를 상징하는 108번뇌를 사그라지게 하기 위하여 수미산 꼭대기에 우뚝 선 누각을 구현한 것이다. 범영루는 751년에 창건되고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시대 두 차례에 걸쳐 지었다가 1973년 복원공사 때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된 것이다.
[대웅전 앞의 석등과 봉로대]
석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기둥과 석등의 크기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석등 앞에 놓인 네모진 대석이 봉로대(熢爐臺)이다. 일반적으로 배례석(올라서서 절을 하는 돌. 신라시대 당시 고관대작만이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함)에는 윗면에 둥근 연꽃이 새겨지지만 불국사의 봉로대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단지 옆면에 긴쪽으로는 2개 짧은 쪽에 1개씩 이빨모양의 돌기가 난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대웅전]
여러차례 고쳤기 때문에 신라시대의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대체로 신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웅전의 정면에 돌계단이 있고 좌우는 행랑에 연결되어 있다. 중앙 정면에는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木彫)의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이 안치되어 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서 있고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이 있다. 이 불상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정확한 조성년대는 알 수 없다.
[무설전]
대웅전의 바로 뒤에 있는 건물로 불국사의 여러 건물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문무왕 10년에 왕명으로 세우고 법화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건물 명칭의 무설이란 설법하는 강당이지만 설함이 없이 설한다는 불교적인 표현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이른바 이전전심과 같은 의미이다.
[안양문과 극락전]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른다.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상징하는 성역이다. 안양(安養)이란 극락 정토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그 문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 일곽은 경덕왕 10년에 지어졌다. 그 당시에는 극락전을 전후 좌우로 두르는 회랑을 비롯하여 석등 및 많은 건물과 석조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극락세계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이 건물들은 대부분이 1593년 왜란 때에 불타 버렸고 지금의 연화교 칠보교를 비롯한 석조물만이 남아있다.
[관음전 관세음보살]
관음전은 비로전 동쪽 언덕위에 있다.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이 있다. 불교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남쪽바다 가운데 솟아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 중 한 쪽에 초록 버들이 늘어져있고 한쪽에는 푸른 대나무가 뻗어 있는 곳에 머문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뻗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란 칭호가 생겼다.
[나한전]
나한전은 아라한을 모신 곳을 말하며 이것은 최근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아라한이란 불교 수행의 계위인 아라한과에 오른 사람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석가모니 당시의 열 여섯 제자들이 모셔졌다. 가운데 불상은 석가모니불이고 양쪽에 제화갈라 보살과 미륵보살이 있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서쪽 석가탑(釋迦塔)과 대조를 이루어 동쪽에 있는 탑. 감은사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가람(雙塔伽藍)의 배치를 보여준다. 기단부는 4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는데, 보계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그 위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軀)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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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 기단부는 몇 장의 돌로 결구(結構)되었고, 아래위 면석(面石)은 탱주 둘을 세워 3구(區)로 구분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층마다 5단. 상륜부(相輪部)는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
불국사< 佛國寺 > 앞면 대석단< 大石壇 > 동쪽의 청운교< 靑雲橋 >·백운교< 白雲橋 >에 대하여 서쪽에 연화교< 蓮華橋 >·칠보교< 七寶橋 >가 있다. 가구수법< 架構手法 >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대동소이하며, 전체의 높이가 청운교의 높이와 같은 소규모의 것이다. 밑의 연화교는 10단의 층계를 만들었는데, 계단식 등항< 登桁 >에 만들어 둘로 나누었고, 양쪽 끝의 등항< 登桁 >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 ...
토함산< 吐含山 >에서 뻗어 내려오는 한 줄기를 잘라 남향으로 석단< 石壇 >을 만들어 고대< 高臺 >를 이루고 불국사를 세웠는데, 이 석단 앞면 두 곳에 석제< 石梯 >를 가설하여 당탑< 堂塔 >에 오르도록 되어 있다. 곧, 동쪽에 있는 2단의 석제< 石梯 >가 이것인데, 밑의 것을 청운교< 靑雲橋 >, 위의 것을 백운교< 白雲橋 >라 한다. 18단의 청운교는 등항< 登桁 >에 의하여 좌우로 구분되었는데, 등항< 登桁 >에는 ...
불국사< 佛國寺 > 극락전< 極樂殿 > 안에 아미타여래좌상< 阿彌陀如來坐像 >(국보< 國寶 > 제27호)과 나란히 안치된 거대한 금동상으로서, 조형감각이나 조형양식이 거의 같은 작품이다. 나형< 螺形 >의 보발< 寶髮 >, 풍요한 자용< 慈容 >, 정안정시< 正眼正視 >의 두 눈, 반달모양의 두 눈썹, 뚜렷한 삼도< 三道 >, 우견편단< 右肩偏袒 >의 양식, 당당한 체구 등에서 서로 같은 조형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손은 ...
불국사< 佛國寺 > 강당< 講堂 > 뒷면에 마련된 소각< 小閣 >에 보존되어 있다. 외형이 석등< 石燈 >과 흡사한 사리탑< 舍利塔 >으로, 사적기< 寺蹟記 >에 나오는 광학부도< 光學浮屠 >가 바로 이것이다. 1906년에 일본< 日本 >으로 반출되었으나 1935년 반환된 경위를 가진 것이다. 약간 홍색을 띤 조질< 粗質 >의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네모반듯한 지복석< 地覆石 > 위에 8각형 지대석< 地臺石 > 각 면에는 아래 ...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석조<石槽>로 석물<石物>이 지니는 둔중한 느낌을 볼 수 없고 경쾌한 형태를 드러내준다. 내부 저면<底面>에는 연꽃모양의 문양<文樣>이 새겨져 있는데 좀 특이한 편이다. 석조<石槽>의 정확한 쓰임새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부처에게 공양<供養>하는 연꽃을 심었던 용기라고도 하는데 현재 불국사석조는 대석축 앞 광장 동단 계단 옆에 식수<食水> 제공<提供>에 쓰이고 있다. 장방형<長方形>인 석조의 외부는 ...